The Outsiders (6)

2020. 12. 21. 11:11개야구

디 어슬레틱 선정,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한 선수들 중 가장 위대했던 선수 100인을 다룹니다.

 

 

오클랜드 3인방 시절의 허드슨

75. 팀 허드슨

Oakland—Atlanta—San Francisco, 1999-2015
482경기 222승 133패 3126.2이닝 2080삼진 3.49ERA / 56.5bWAR

스터프는 허접했지만 무척이나 영리한 투수였다. 허드슨은 항상 이긴다. 매년 이긴다. 원하는 곳으로 공을 집어넣었고 더블 플레이를 유도했다. 1999년부터 2013년까지, 15년 연속으로 패배보다 승리가 많은 투수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7번의 포스트 시즌을 경험했다. 2014년에는 월드 시리즈에 2회 등판하며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우승에 일조한다.

 

팀 허드슨은 우리가 훌륭한 투수를 떠올렸을 때 잘 연상되진 않는 투수다. 팀을 위해 꼬박꼬박 등판하며 매년 승리를 수확했지만, 월드 시리즈에서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이거나 노히터를 만들어내거나 사이 영 상을 수상하거나. 화려했던 적은 없었다.

 

마찬가지로 한 경기에서 15개의 삼진을 잡아낸다거나 한 적도 없었다. 논란이 될 만한 말을 한 적도 없었다. 허드슨은 조용히 공만 던졌다. 본인은 이에 대해 "전 아무 불만도 없어요. 어릴 적 꿈을 이뤘고 완벽한 가족도 있는걸요."라고 말했다.

 

매년 200이닝을 던질 준비가 되어있는 남자. 222승, 120ERA+을 이룬 사나이가 이번에 마크 벌리와 함께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에 서게 된다. 마크 벌리는 허드슨과 비슷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앤디 페티트라는 살벌한 경쟁자¹도 있다. 

 

(역1. 앤디 페티트는 약물 복용이라는 치명적인 이슈를 안고 있긴 합니다. 하지만 다른 악질적인 치터들에 비해 어느 정도 감안이 되는 편입니다. 끝까지 부인하던 팔메이로나 배리 본즈와는 다르게 곧바로 시인했거든요. 성장호르몬 사용 목적이 팔꿈치 부상을 치료하고 빠르게 회복하기 위해서라지만, 이 변명에 대한 해석은 차가운 편입니다.)

 

팀 허드슨이 과연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수 있을까? 그의 위대한 도전이 시작된다.

 

 

Francis Joseph "Lefty" O'Doul (March 4, 1897 – December 7, 1969)

74. 레프티 오둘

New York Yankees—Boston—Philadelphia—Brooklyn—New York Giants, 1919-1934
970게임 3660타석 1140안타 113홈런 624득점

.349 .413 .532 .945 / 26.9bWAR

 

이건 뭘까? 일단 오둘은 1929년¹에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한다. 그것도 4할에서 고작 2리가 모자란 타격왕이다.

 

(역1. 1929년의 오둘은 254개의 안타, 32개의 홈런, 122타점, 152득점을 기록하는데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아있는 단일 시즌 최고의 공격 기록 중 하나입니다.)

 

특이하게도 오둘의 커리어를 살펴보면 20대의 많은 부분이 비어있다. 이건 그가 20대 내내 마이너 리그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말 그대로 마이너 리그를 폭격했는데 내내 승격하지 못한 채로 있었다.

 

필자는 이 글이 명예의 전당을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었다. 명예의 전당과 관련된 수많은 테마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눌 때, 과연 레프티 오둘의 야구 인생이 어땠는가를 고려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31살이 될 때까지 기회를 받지 못했다. 승격된 직후, 다섯 시즌 동안 MVP 포디움을 두 번 경험하고 0.365, 0.428, 0.555의 슬래시 라인을 기록한다. 그렇지만 이게 전부고 이 5시즌 외에는 특별하게 짚을 구석은 없다. 이게 그가 명예의 전당에 없는 이유다.

 

오둘은 선수로서도 뛰어났지만 이건 그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극히 작은 일부에 불과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야구라는 분야에 있어서 혁명가였다. 투수의 옥석을 철저하게 가려내서 스카우팅한 매니저였고, 후학을 위해 저서를 남긴 최초의 타자였으니까. 

 

또한 샌프란시스코의 명감독이었으며 대타자 조 디마지오의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목할 부분은, 일본에 야구를 전파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미국인이라는 점이다.

 

이게 그의 야구인생을 평가하는 작업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오둘은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일본으로 떠난다. 야구를 보급하고 선수들을 가르치며 스포츠 리그가 활성화되는 과정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쪽으로는 굉장히 전설적인 인물이어서, 도쿄에서 가장 유명한 구단의 명칭도 오둘의 뉴욕 자이언츠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된 최초의 미국인이며, 이러한 활동 경력이야말로 명예의 전당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휴스턴의 장난감 대포

73. 지미 윈

Houston—Los Angeles—Atlanta—New York Yankees—Milwaukee, 1963-1977
1920게임 8011타석 1665안타 291홈런 1105득점 225도루

.250 .366 .436 .810 / 55.8bWAR

Toy Cannon¹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간단히 베이스에 나갔으며, 빠르게 달렸고, 외야수 전 포지션을 훌륭하게 소화해냈다. 심지어 홈런까지 뻥뻥 때려낼 수 있었다.

 

항상 비거리가 엄청난 홈런²을 날려댔는데 일화가 재미있다. 지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똑딱이는 셰보레를 몰지만 거포는 캐딜락을 몬다"고 가르쳤다고. 훗날 야구선수가 된 지미는 물론 캐딜락을 몰았다.

 

(역1. 5피트 9인치, 그러니까 175cm 73kg이라는 야구선수치고 왜소한 체격으로 홈런을 뻥뻥 쳐대서 붙은 별명입니다. 사실 첫줄의 do everything이라는 찬사도 윌리 메이스의 전유물인데, 메이스의 모습이 겹쳐보였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 같네요.)

 

(역2. 한때에 불과하지만 홈런왕 행크 아론도 자신감을 잃게 만들었던 타자입니다. 당시 구장 차이도 좀 심각하긴 했습니다. 어쨌든 지미는 1967년 6월 10일, 장외홈런을 하나 치는데 이 타구는 75번 주간 고속도로에 떨어집니다. 5일 후에는 한 경기 3홈런을 쳐서 구단 신기록을 세웠고, 한달 후에는 포브스 필드의 중앙 담장을 타격하는 140미터짜리 홈런을 쳐냅니다.)


지미 윈은 시대적으로 너무 과소평가된 타자다. 일단 지미가 활동한 1960년대는 극단적인 투고타저의 시대였다. 또 그가 700경기나 출전했던 휴스턴의 홈 구장은 타자들에게 악몽과도 같은 투수구장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미가 2할 5푼짜리라고 여기지만, 그가 무수한 볼넷을 얻어냈다는 것은 지나치게 간과하고 있다. 그만큼 볼넷이 존중받지 못한 시대였다.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지미 윈이 기록한 중견수 WAR는 무려 41.2이다. 그 윌리 메이스 바로 다음을 마크했음에도 불구하고, 지미는 당대의 큰 관심을 이끌어내진 못했다.

 

휴스턴 애스트로스 시절 올스타로 한 번 출장했다. MVP 10걸에도 한 번밖에 들지 못했는데 이건 선수 생활 말년인 다저스 시절이었다. 지미의 커리어는 35살부터 하락하는데, 1665개의 안타와 291개의 홈런으로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리그 평균자책점이 3.5를 찍었던 시대에서(...) 한 시즌 148개의 볼넷을 받아내던 실력을 고려해봤을 때, 지미 윈이 선수생활 동안 손해본 마일스톤은 무척이나 아쉽다.

 

 

 

헬멧 쓴 1루수, 존 올러루드

72. 존 올러루드

Toronto—New York Mets—Seattle—New York Yankees—Boston, 1989-2005
2234게임 9063타석 2239안타(513개의 2루타) 255홈런 1230타점 11도루

.295 .398 .465 .863 / 58.1bWAR

Johnny O는 아름다운 스윙을 선보였고, 꾸준히 존재감을 드러냈으며, 삶과 야구에 있어서 늘 긍정적인 태도를 견지했던 사람이다. 하마터면 올러루드는 대학 시절 공에 맞아서 죽을 뻔하기도 한다. 골프와 농구 등, 두루두루 능했던 스포츠맨이지만 결국 야구에 정착한다.

 

데뷔 이후 17년 동안 훌륭한 타율과 출루율을 기록하는데, 291홈런만큼이나 멋진 500개의 2루타를 생산했다. 또한 1루 수비가 뛰어났다. 캐나다 야구 명예의 전당 회원이기도 하다.

 

한번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는 올러루드의 모습을 살펴보자. 그는 명예의 전당에 적합한 인물로 보인다. 멋진 슬래시라인을 가졌고, 무엇보다도 1루 수비가 뛰어났다는 부분에 있다. 이러한 부분은 통계로 드러나는데, 올러루드보다 뛰어난 1루 수비 스탯을 가진 야구선수는 키스 에르난데스 말고 아무도 없다.

 

올러루드는 58의 WAR를 가지고도 첫해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에서 고작 4표만을 얻는 데에 그쳤다.

 

 

 

David Gus "Buddy" Bell  (born August 27, 1951) 

71. 버디 벨

Cleveland—Texas—Cincinnati—Houston, 1972-1989

2405게임 10009타석 2514안타(481개의 2루타) 201홈런 1151득점 55도루

.279 .341 .406 .747 / 66.3bWAR

 

무려 3대에 걸쳐 메이저리그에서 야구를 하고 있는 집안¹이다.

 

버드 벨은 빅 리그에서 2500안타를 기록한 훌륭한 선수이자 뛰어난 내야수였다. 3루수 중 그보다 훌륭한 수비를 가진 선수를 찾아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한번은 누군가가 버디에게 명예의 전당에 대해서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는 "괜찮아요. 난 그냥 시합하는 게 재미있었어요."라 말했다고.

 

아마 Outsiders 연재에 선정되는 선수들 중에는 3루수가 제일 많을 것이다. 3루에는 정말 뛰어난 선수가 많아서 그렇다. 3루는 복합적인 포지션이다. 수비력도 훌륭해야겠지만, 동시에 공격력도 뛰어나야 한다.

 

그런데 기자들은 3루수 중에서 공수 양면으로 뛰어난 선수가 얼마나 가치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 같다. JAWS로 살펴보아도² 그는 평균에 근접한다. 버디 벨은 그런 선수였다.

 

쿠퍼스 타운에 헌액된 루이스 아파리시오, 필 리주토, 빌 매저로스키, 넬리 폭스, 래빗 마란빌만 해도 뛰어난 유격수 수비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간 선수들이다. 벨은 단지 그걸 3루에서³ 해냈을 뿐이다. 심지어 그들보다 공격력은 훨씬 더 우수했다.

 

(역1. 아버지인 거스 벨도 메이저리그에서 206홈런을 기록한 외야수였습니다. 미네소타 트윈스의 3루수였던 마이크 벨과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3루수로 뛰었던 데이비드 벨은 아들들로 둘 다 메이저리그 선수였습니다.)

 

(역2. JAWS는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를 평가할 때 사용하는 지표입니다. 통산 WAR에 커리어하이 일곱 시즌의 WAR를 더한 다음 상수로 나누는데, 예측 정확도뿐만 아니라 평가 척도로써도 애용되고 있습니다.)

 

(역3. 버디 벨의 dWAR 23.8은 언급된 다섯 명의 유격수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다.)

 

(현재 벨 옹은 신시내티의 레즈의 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직함은 무려 총괄 매니저 겸 수석 고문인데, 바우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한번 듣고 싶네요. 한 푼이라도 더 아껴보려고 소니 그레이 트레이드를 백방으로 알아보는 레즈가 붙잡을 리는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