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9. 21:30ㆍ개야구
디 어슬레틱 선정,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한 선수들 중 가장 위대했던 선수 100인을 다룹니다.
85. 론 기드리
New York Yankees, 1975-1988
368게임 170승 91패 95완투 26완봉
2392이닝 1778삼진 3.28ERA 47.8bWAR
루이지애나 라이트닝, 론 기드리는 1970년대 브롱스 동물원의 에이스로 자신이 등판한 경기의 65%를 승리했다.
또한 1978년에는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훌륭한 투수 시즌 중 하나¹로 마무리한다.
(역1. 이 해의 론 기드리는 1.74의 방어율로 방어율 1위, 248탈삼진과 25승 3패의 성적으로 만장일치 사이 영 위너에 등극합니다. 또한 월드 시리즈를 우승합니다. 커리어 하이 시즌이기도 하지만 메이저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극히 드문 1년을 보냈네요.)
랜돌프는 자신과 함께 했던 선수 중 기드리가 가장 사나운 경쟁자였다며 회상한다. 론 기드리는 그의 동료 화이트 포드와 비교를 자주 당한다. 우선 둘 다 좌완이었다. 그리고 둘 다 비교적 커리어가 짧았고, 굉장히 높은 승률을 기록했던 점까지 비슷하다.
하지만 포드는 기드리보다 더 나은 커리어를 오래 유지했다. 그래도 1977년과 1978년 두 해는 기드리가 포드보다 훌륭했다. 기드리는 170승을 기록하는 데서 그쳤기 때문의 득표율이 낮았다². 다만 1977년부터 1985년까지만큼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한 그 어느 투수보다도 훌륭한 피칭을 선보였다.
(역2. 리그를 지배했던 투수였기 때문에 기드리의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는 9수까지 갑니다. 그렇지만 2002년 마지막 투표에서 4.9%라는 득표율을 보이며 탈락합니다. 이런 투수라도 누적이 부족한 게 너무 뼈아팠네요.)
84. 월리 버거
Boston Braves—New York Giants—Cincinnati—Philadelphia Phillies, 1930-1940
1057게임 4552타석 1550타석 242홈런 898타점 36도루
.300 .359 .522 .881 / 42.5 bWAR
1930년, 보스턴 브레이브스는 역대 메이저리그를 통틀어 가장 훌륭한 신인³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 테드 윌리엄스가 등장하기 전까지 월리는 보스턴의 슈퍼스타였다.
(역3. 월리 버거의 데뷔 시즌 기록은 0.310, 38홈런, 119타점)
어깨 부상으로 경력은 매우 짧았다. 그렇지만 커리어 내내 3할을 기록할 정도로 훌륭했던 1930년대 최고의 야구 스타였다. 월리는 시대적으로 불운했던 많은 선수들 중 하나였다. 마지막까지도 부상으로 인해 커리어를 망쳤다. 이런 식으로 불운했던 선수들이 수도 없이 많다. 1933년에는 MVP 3위를 차지하고 그 유명한 "1만 달러짜리 홈런"을 쳐냈다.
1만 달러 홈런이 뭐냐면, 보스턴은 1920`s을 넘어 1930`s 초까지도 형편없는 팀이었다. 그런데 1933년에는 첫 디비전 시리즈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8개 구단 중 상위 4개 구단에 드는 것은 무척 어렵다. 보스턴이 첫 디비전 시리즈에 들어가려면 마지막 경기에서 필라델피아를 상대로 승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월리는 2주 동안 폐렴으로 결장했고 마지막 경기에도 선발 출장하지 못했다.
감독은 그런 그를 한 타석 내보내기로 결정했고, 보스턴의 점수는 1:0으로 뒤진 상황. 타석에 나간 월리는 만루 홈런을 치고 돌아왔다. 보스턴 브레이브스는 이 홈런으로 승리하면서 첫 디비전 시리즈에 가게 됐고 수훈선수 월리 버거는 1만 달러를 따낸다.
물론 팀원 모두가 나눠 갖는 금액이고 선수들 개인에게 돌아가는 금액은 몇 백 달러에 불과했다. 1930년대 야구니까.
83. 드와이트 구든
New York Mets—New York Yankees—Cleveland—Houston—Tampa Bay, 1984-2000
430게임 194승 112패 68완투 24완봉승
2800.2이닝 2293삼진 3.51ERA 48.2bWAR
닥터 K라고 불렸던 젊은 투수. 젊은 나이에 압도적인 성적을 이뤄낸 투수⁴ 중 하나였다.
(역4. 1985년 구든이 거둔 성적은 라이브볼 이후 가장 화려했던 시즌을 통틀어도 비교대상을 찾기 어렵습니다. 1968년의 밥 깁슨을 넘어섰고, 그 1999년의 외계인과 비견됩니다.)
찰스 경이라 명명한 커브와 무지막지한 포심 패스트볼로 메이저리그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소포모어 징크스 따위는 가볍게 비웃으며, 스무 살이 되는 두 번째 시즌에 1.53의 평균자책점과 25승 4패의 성적을 기록한다.
라이브볼 시대 최고의 피칭을 논해보자. 1972년의 스티브 칼튼(12.2bWAR), 1997년의 로저 클레멘스(12.1bWAR), 1920년의 피트 알렉산더(11.9bWAR), 1971년에 42경기 334이닝을 던진 윌버 우드(11.8bWAR), 그리고 2000년의 페드로 마르티네즈(11.7bWAR)와 비견될 만한 퍼포먼스다. 1985년의 구든(12.2bWAR)은 그런 투수였다.
사실, 우린 구든이 어떤 결말을 맞았는지 알고 있다. 마약 중독, 온갖 필드 밖에서의 논란거리들. 게다가 그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지 못한 이유도 알고 있다. 그렇지만 구든이 딱 1년만 더 해냈더라면? 그렇다면 아마 오른손 쿠팩스가 되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아주 많은 논란거리에도 불구하고 샌디 쿠팩스처럼 헌액되었으리라 생각한다. 23살 이후에도 드와이트 구든은 좋은 투수였다. 하지만 더 이상 'The Pitcher(그 투수)'는 아니었다.
한때 구든의 팀메이트였던 달링은 호언장담했다. 일단 그의 명예의 전당 입성 여부는 둘째 치고, 미래의 메이저 리그에도 그처럼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시즌은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82. 엘스턴 하워드
New York Yankees—Boston, 1955-1968
1605게임 5845타석 1471안타 167홈런 762타점 9도루
.274 .322 .427 .749 / 27.1bWAR
의문이 들 만한 누적 기록이겠지만, 엘스턴은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한 야구 선수들을 꼽으면 언제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이름이다. 최초로 뉴욕 양키스의 로스터에 포함된 흑인으로, 개척자이자 영원한 올스타다. 1963년, 엘스턴 하워드가 MVP를 수상했다는 건 가장 존경받는 선수로 여겨졌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엘스턴의 빈약한 커리어는 여러 요소들을 감안해야 한다. 먼저 엘스턴은 마이너 리그가 아니라 니그로 리그에서 시작했다. 게다가 도중에는 야구를 중단하고 한국 전쟁에 징집되어 2년 동안이나 동방의 작은 나라를 위해 싸웠다¹.
(역1. 활동 시기가 겹치네요. 전설의 포수이자 양키스 선배이기도 한 요기 베라는 2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던 베테랑 해군)
그리고 26살이 되는 해에 겨우 데뷔를 한다. 그런데 양키스는 리그 최고의 포수를 갖고 있었다. 요기 베라. 덕분에 30살이 되어서야 간신히 풀타임 시즌을 시작할 수 있었다. 늦은 나이, 이제야 겨우 주어진 기회.
엘스턴 하워드는 30살~35살 시즌 동안 0.293의 타율과 0.478의 장타율을 포수로서 기록한다!
또한 9년 연속 올스타 멤버로 선정되었고, 골드 글러브는 두 번, 그리고 MVP를 1회 수상한다. 그가 잃어버린 20대를 감안하면 얼마나 경이로웠는지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뉴욕 양키스라는 거대한 팀에서 최초로 흑인 선수로 활동했던 엘스턴의 영향은 지대하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설 자격이 충분하다.
81. 오렐 허샤이저
Los Angeles—Cleveland—San Francisco—New York Mets, 1983-2000
510게임 204승 150패 68완투 25완봉승
3130.1이닝 2014삼진 3.48ERA 51.4bWAR
불독은 다저스의 1988년 우승을 혼자서 이끌었다. 페넌트레이스부터 포스트 시즌까지.
1988년, "Bulldog" 허샤이저는 59.1이닝 연속 무실점이라는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수립한다. 리그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메츠를 스윕해버리면서 세이브를 올렸고, 월드 시리즈에서는 무려 MVP²에 오른다. 204승을 거둔 영리한 투수.
(역2. 88년 챔피언스 시리즈 4경기 24.2이닝 1승 1세이브 3자책, 88년 월드 시리즈 2경기 18이닝 2완투승 2실점)
사실 허샤이저의 명예의 전당 첫 투표율은 썩 괜찮았다. 58표를 받았고, 11%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나쁘지 않은 시작이다. 커리어도 양호하고, 큰 경기에 강했으며,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야구 선수였다.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한다.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루키 시절에 마이너행 통보를 받았을 때, 버스에서 하차해야만 했고 이때 페드로는 하염없이 울었다고 한다. 이 시기에 이미 슈퍼스타였던 오렐이 다시 콜업될 일이나 있을까, 싶은 신인을 신경 써줄 이유가 있었을까? 오렐은 그 모습을 보더니 야구공에 친필 사인과 함께 따뜻한 말을 적어서 선물했다. "당신은 진정한 빅 리거에요. 곧 다시 뵙겠습니다. 오렐."
허샤이저의 성격을 소개하는 대표적인 일화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허샤이저는 결국 명예의 전당에 도달하지 못했다. 유권자들의 불독에 대한 관심은 빠르게 식어버렸다. 오렐 허샤이저는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기자들이 명예의 전당 헌액 투표에서 누군가를 떨어뜨릴 때, 성격에 관한 이야기를 마이너스 요소로 자주 써먹는다. 그러나 허샤이저처럼 리그를 아름답게 하는 사람들에게는 플러스 요소로 써먹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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