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16. 21:01ㆍ개야구
디 어슬레틱 선정,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지 못한 선수들 중 가장 위대했던 선수 100인을 다룹니다.
100. 후안 곤잘레스
Texas—Detroit—Cleveland—Kansas City, 1989-2005
1689게임 7155타석 1936안타 434홈런 26도루
.295 .343 .561 .904 / 38.7 bWAR
MVP 2회 수상자, 후안 곤조는 한 시즌 40홈런 이상을 5번이나 기록한 강타자였다.
"나는 베이스에 사람이 있으면 더욱 집중한다"는 어록으로 유명하다.
사실 후안이 받은 2번의 MVP는 모두 논란거리가 있다. 후안 곤잘레스가 활동하던 시절의 메이저리그는 타점과 홈런을 유독 중요시하던 시기였다. MVP 선정 기준도 마찬가지였다. 유권자들은 홈런과 타점을 너무 좋아했고, 알버트 벨을 너무 싫어했다.
1996년도의 알버트 벨은 후안 곤잘레스보다 홈런을 더 많이(1개) 기록했다. 타점도(4개) 마찬가지. 그러나 MVP를 차지한 건 알버트 벨이 아니라 후안 곤잘레스였다.
게다가 1998년에는 켄 그리피 주니어, 혹은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MVP를 받는 것이 옳았다. 사실 가장 큰 논란거리는 전술한 2명보다도, 위대한 팀의 일원이었던 데릭 지터의 수상 불발이었는지도 모른다. 1998년의 유권자들이 가장 인기 있었던 팀, 가장 위대했던 팀, 가장 훌륭했던 선수를 MVP로 선정하지 않은 것은 놀라웠다.
99. 프레드 린
Boston—California—Baltimore—Detroit—San Diego, 1974-1990
1969게임 7923타석 1960안타 306홈런 72도루
.283 .360 .484 .845 / 50.2 bWAR
프레드 린은 당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선수 중 하나였다. 린은 ROY와 MVP를 동시에 수상했다. 메이저리그 역대 최초의 기록이다. 뿐만 아니라 팬웨이 파크의 몬스터를 두들겨대며, 올스타 게임 역사상 유일한 만루 홈런까지 기록한 타자였다.
야구에 만약이란 없다. 그러나 어쩌면, 프레드 린이 계속 보스턴에서 머무를 수 있었다면.
어쩌면 린은 명예의 전당에 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펜웨이 파크에서 타격하는 린의 OPS는 2할이나 더 높았다.
그러나 보스턴은 린에게 많은 돈을 지불하길 꺼려했고, 린은 결국 캘리포니아로 떠난다. 그렇게 린은 MVP에서 평범한 선수로 변하고 만다. 그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열정으로 게임에 임했고, 부상을 달고 다녔으며, 이윽고 많은 경기를 결장하게 된다.
그게 레드삭스의 강타자 프레드 린이 명예의 전당에 가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98. 로키 콜라비토
Cleveland—Detroit—Kansas City—Chicago White Sox—Los Angeles—New York Yankees, 1955-1968
1841게임 7559타석 1730안타 374홈런 19도루
.266 .359 .489 .848 / 44.5 bWAR
로키 콜라비토의 어릴적 우상은 조 디마지오였다고 한다. 한때 마릴린 먼로의 남편이었으며, 베이브 루스의 뒤를 이어 양키스의 상징이 된 사나이. "The Yankee Clipper" 조 디마지오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타자였다.
로키 콜라비토는 바로 그 디마지오처럼 사랑받았던 야구선수였다.
로키 콜라비토를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의 우익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최고의 어깨를 가졌던 우익수를 논한다면, 로키 콜라비토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60년. 로키가 디트로이트로 떠나게 되었을 때, 클리블랜드 팬들은 그를 떠나보내는 것을 견디지 못했다. 1960년대의 야구 팬들은 그가 당연히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인물이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파워를, 그리고 믿지 못할 어깨를 지닌 선수였다. 필자가(역주: 디 어슬레틱에 기고한) 어렸을 때, 또 그가 코치였을 때. 필자는 로키 콜라비토가 공을 던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그가 홈 플레이트에서 공을 던져 클리블랜드의 중앙 담장을 넘기는 모습을 보고 필자는 경악했다.
콜라비토는 리그 최다 홈런 1회, 최다 타점 1회, 최고 장타율 1회, 최다 안타 2회를 기록한 선수였다. 그가 374개의 홈런을 끝으로 은퇴했던 시점에, 374홈런은 역대 1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콜라비토의 기량은 31살에 접어들며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했고, 결국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97. 알버트 벨
Cleveland—Chicago White Sox—Baltimore, 1989-2000
1539게임 6679타석 1726안타 381홈런 88도루
.295 .369 .564 .933 / 40.1 bWAR
알버트 벨. 메이저리그가 기억하는 가장 공포스러운 타자.
벨은 90년대, 엄청난 파워를 자랑했던 클리블랜드 타선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한 시즌 50개의 홈런, 한 시즌 50개의 2루타 기록을 동시에 달성한 유일한 선수였다.
알버트 벨은 100위로 꼽은 후안 곤잘레스와는 정반대 유형의 타자라고 말할 수 있다.
*1994년, 벨은 0.357의 타율과 0.714의 장타율을 기록한다.
>그러나 벨은 MVP 투표에서 1위표를 단 한 개도 얻지 못했다.
*1995년, 벨은 52개의 2루타와 50개의 홈런을 기록한다.
>그러나 기자들은 벨이 아니라 모 본을 MVP로 선정했다.
*1996년, 벨은 1996년 후안 곤잘레스보다 더 많은 홈런과 더 많은 타점을 기록한다.
>후안 곤잘레스는 벨보다 더 적은 홈런, 더 적은 타점을 기록하지만 MVP를 수상했다.
*1998년, 벨은 48개의 2루타와 49개의 홈런, 152타점과 0.328의 타율을 기록한다.
>그러나 벨은 MVP 투표에서 고작 8위를 차지하는 데에 그친다.
기자들은 알버트 벨을 몹시 싫어했다. 물론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벨 역시 기자들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그의 경력이 매우 짧아서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지 못했다면, 그건 별로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1990년대에, 알버트 벨이 보낸 10년을 보자. 그의 경력은 그저 "훌륭한 타자"였다고 가볍게 간추려질 수 없다. 단지, 메이저 리그 역사를 통틀어도(All-time) 그보다 위대했다고 말할 수 있는 타자는 몇 되지 않는다.
96. 지미 셰커드
Brooklyn—Chicago Cubs—St. Louis—Cincinnati, 1897-1913
2122게임 9247타석 2084안타 56홈런 465도루
.274 .375 .378 .753 / 49.7 bWAR
20세기 메이저리그에서 첫 10년을 가장 훌륭하게 보냈던 수비형 외야수일 것이다. 아마도.
강력한 어깨로 눈부시게 빠른 송구를 보여준 선수였다. 지미 셰커드는 리그에서 가장 볼넷을 많이 골라냈던(2회) 끈기 있는 선수였으며, 가장 많은 도루를(2회) 기록한 공격적인 주자였다.
20세기의 야구선수들은 셰커드를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출루하고, 도루했으며, 득점했다. 심지어 숨 막히는 좌익수 수비까지 선보였다.
또 셰커드가 기록한 286개의 희생타는 역대 15위에 위치한다. 전설적인 스포츠 작가, 링 랑드너는 셰커드를 보고 "내가 본 외야수 중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그러나 지미 셰커드는 초기 명예의 전당에서 밀려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지미 셰커드는 마치 신과 같았던 야구선수들을 상대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야 했다. 결국 그 이후로도 셰커드의 경력은 명예의 전당에서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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