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베가스에서만 생길 수 있는 일(2008)

2020. 11. 6. 15:31다시 읽기

What Happens in Vegas

 

처음 본 게 언제인지 기억 안 나는데(아마 2008년, 2009년),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를 종종 다시 보곤 한다.

 

<엣지 오브 투모로우>의 마지막 장면, <나의 독재자>에서 박해일과 류혜영이 계단에서 톡 쏘는 대화를 주고받는 장면,<조조 래빗>에서 클렌첸도르프 대위가 작별인사를 하던 장면, <화양연화>, 왕가위의 <에로스>, 손예진이랑 전지현이 차태현하고 나오는 영화...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정말 좋았다"나 "나도 그 영화 좋아한다"는 감상이 한계인 영화는 거의 다시 안 보는 것 같다. 예외가 있다면 주성치 정도? 한 해가 지날 때마다 눈에 띄게 흉해져가는 내 마음이 본능적으로 내켜하지 않는 것 같다. 햇빛을 보면 타버린다는 뱀파이어 전설처럼, 너무 좋아하고 잘 만든 작품들은 다시 펼쳐보기가 무섭다.

 

처음의 감동과 여운을 더럽힐까 두려워서는 분명히 아니다. 뮤지컬이나 발레는 그럴지도 모르겠는데 필름은 안 변하니까. 영화는 안 변하고 항상 가장 좋았을 때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하지만 해가 지날수록 나는 자꾸 변한다. 흉하게. 언젠가는 내 감수성이 메말라서 왕가위와 주성치를 보고도 아무것도 못 느끼면 어쩌나 싶어 좀 두렵다.

 

영화 보는 내내 시큰둥했으면서, 장면 하나에 꽂혀가지고 여러 해 붙잡혀있는 경우가 꽤 된다. 내 경우에는.

 

대체로 콧날을 시큰하게 만들거나, 몇 분 몇 초경 필름에서의 그림이 너무 예뻐서 기억에 남는 경우? <나인 하프 위크>가 정확히 이런 느낌이다. 아니면 작중 인물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재치있는 경우. <나의 독재자>나 <무뢰한>이 여기 해당된다. 툭툭 내뱉는 말끝에도 인물들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고, 신경 진짜 많이 썼구나 싶은 거. 

 

문어체 투성이의, 문제투성이의 대본을 다듬지도 않고 그대로 읊는구나 싶은 영화들은 보다가 그냥 영화관에서 나와버린다. 아니면 끈다. 배우도 감독도 포기한 영화를 굳이 붙잡고 있을 까닭이 없으니. 물론 류혜영이 "너란 게 슬프다"라고 하는 장면은 좀... 솔직히 어마어마한 위화감을 느꼈지만. 옥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티도 용납이 되는 경우 아닐까.

 

아무튼, 어떤 이유가 되었건, 내 마음속에 작은 울림 하나라도 만들면 일기에 적는다. 이날 아무개 영화를 봤는데 이런 부분이 너무 좋았다~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드라마보다는 순간의 반짝임이 중요한 것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첫사랑 사수 궐기대회>, <야수와 미녀>는 참 유치한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그 애틋함이 좋아서 종종 찾아보는 것처럼.

 

이렇게 쿨타임만 돌면 떠오르는 영화들이 꽤 있다. 이것도 그중 하나.

 

드라마의 만듦새가 어떻고 촬영 기법은 어떠했는지, 어딘가의 시네필처럼 고급진 감상을 넣으려면 필연적으로 여러 번 돌려봐야 할 것 같은데, 기억 속에서 뜸해질 때까지 좋았던 장면의 여운에 푹 빠져있는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영화들이 좋다. 해피 엔딩이고 매력적인 주변 인물들도 있고.

 

간지러운 대사로 속에 있는 이야기 3000가지 다 꺼내서 보여주려고 하기보다는 한마디씩 불편하게 주고받더라도 충분히 진심을 전달하는, 좋은 눈빛과 대사. 내가 좋아하는 요소들은 다 있다. 텔레파시를 할 순 없는 건데 예쁘고 잘생겼으면 에둘러 표현해도 뭔가 전해지는 느낌이 든다. 때문에 애쉬튼 커쳐랑 카메론 디아즈는 명배우가 맞다.

 

설득력을 더하기 위한 사진들

ㄹㅇ 명배우.

 

애쉬튼 커쳐

 

<나비 효과>부터 느꼈지만 사실 이입이 전혀 안 되는 외모인데, 미국 러브 코미디는 왠지 그게 있다.

 

마초이즘보다는 반지성주의에 가까운 유머코드?

 

깨는 설정이나 행동을 반드시 넣어서 '얘가 존잘이긴 한데 이런 모습 보면 너랑 별로 다를 것도 없어'를 강조한다. 여성향이든 남성향이든. 그래서 애쉬튼 커쳐가 나오든 잭 애프론이 나오든 크리스 헴스워스가 나오든 그냥 실실 웃으면서 볼 수 있는 느낌.

 

사진 배치를 바꿀 걸 그랬네. 디아즈 누나가 아래 있었으면 싱글벙글 마저 썼을 텐데, 애쉬튼 커쳐 사진 올려놓으니 갑자기 영화 내용 되새김하는 것도 귀찮아진다.

 

막상 나오는 캐릭터들이 많은 것도 아니고, 걔들한테 풍부한 대사를 준 것도 아닌데 내 주변의 일인 것처럼 생명력이 넘실거린다. 부담없이 편히 보기 좋은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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